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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리뷰/영화

저수지의 개들(1992) - 타란티노, 수다와 폭력 사이

by 김꼬까 2021.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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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인 감상입니다.

평점 ●●●●

 

 

스포일러 없습니다.

 

 

누가 저한테

제일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한 명을 고르기는 힘들다고 대답할 겁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영화 감독을

10명쯤 꼽아보라고 하면,

그 안에는 타란티노가 분명히 들어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고를 때,

그냥 그 영화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경우도 있지만

특정 감독/배우의 필모그래피를

각 잡고 깨는 경우도 있거든요.

 

타란티노는 후자였습니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게 딱 제 취향이에요.

아 잔인한 거 너무 조아 힣히

 

 

타란티노 영화 중에서

잔인하지 않은 영화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베고 썰고 하는 건 또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히 시간만 계산해보면,

잔인한 씬보다 앉아서 노가리까는 씬이

훠어어얼씬 더 길 겁니다.

 

대사가 오지게 많아요.

「저수지의 개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타란티노 영화들도 다 그렇습니다.

 

 

사실 타란티노 영화의 포인트는

수다입니다.

 

예를 들어서 라면 끓이는 걸로 대사를 친다면,

다른 영화 
: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여먹었는데 맛있었어. 


타란티노 영화
 : 내가 이틀 전에 마트에 갔는데 왠일로 너부리가 세일을 하는거야. 난 원래 푸라면 밖에 안 먹는 거 알지? 면발이 굵은 건 빨리 퍼져서 싫거든. 평소 같았으면 너부리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근데 한 묶음 가격에 두 묶음을 준다잖아. 워 ㅅㅂ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렇게 팔아서 남는 게 있어? 혹시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은 걸 땡처리하나 싶어서 날짜도 확인해봤는데 그것도 아닌 거야. 그래서 속는 셈치고 사왔지. 냄비에 물을 받는데 '괜히 사왔나? 먹었는데 맛없으면 나머지는 어쩌지? 버리기엔 돈 아까운데... 지금이라도 가서 푸라면으로 바꿀까?' 이렇게 막 온갖 생각이 드는데 엄청 고민이 되더라고. 그러다가 봉지 딱 뜯으니까 그 불안함이 간절함으로 바뀌더라. 이제 봉지를 뜯었으니까 가서 바꿔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남은건 먹든 누구한테 주든 알아서 처리해야 될 거 아냐. 맛있어라 제발. 맛없으면 시발 너부리 세일한다고 덥석 사온 내가 병신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맛있어야 된다고 막 세뇌를 했는데.... (아직 면 넣는 부분은 나오지도 않음)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되게 호불호가 갈려요.

제 지인은 타란티노 영화를 보고서,

"잔인한 데다가 말만 많아서 재미없다."

혹평했습니다.

 

뭐, 각자 취향은 다른 거니까요.

취향을 존중합니다.

 

 

제가 저 많은 양의 대사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밀당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러닝타임 내내 막 깍뚝썰기하고 어슷썰기하는

슬래셔 영화들을 보다 보면 어느새,

뭘 썰어도 시큰둥해진 자신을 발견한 적 없으십니까.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한 장면으로 도배하면

오히려 감흥이 떨어져요. 

 

하지만 타란티노 영화는 기다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오지고 지리게 많은 대사를 지나서

영화가 절정에 다다를 때쯤 되면

잔인한 장면을 빵빵 터뜨려 주거든요.

 

밀당이 쩔어줍니다. 

 

그리고 그 많은 대사가 전부

의미없이 하는 말인 건 아닙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그 캐릭터가 어떤 성격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아까 나왔던 인물 혹은 사건의

실마리를 주는 경우도 있고,

 

나중에 일어날 사건의 복선을 까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진짜 실없는 이야기인 경우도 있고요.

 

하지만 그 모든 대사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만듭니다.

"아니 ㅅㅂ 저 새키 완전 개생키네?

저런 새키는 죽어야지!"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폭력적인 장면으로

그 개생키를 응징합니다.

 

대부분 끔살당하죠. 이런 사이다가 또 없습니다.

 

 

 

 

「저수지의 개들」은 타란티노의 데뷔작이었는데요.

첫번째 영화부터 역시 수다가 장난이 아닙니다. 

 

얼마나 심하냐면, 영화 시작하고 나서

계속 수다만 떨다가 무려 9분이 지나서야

「저수지의 개들」 타이틀이 뜨고

오프닝 크레딧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말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입니다.

 

 

 

스포일러 없이 아주 간략하게

줄거리를 설명드리자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보석을 털기로 했습니다. 

주동자인 조 캐벗, 조의 아들 에디,

그리고 까만 정장 쫙 빼입은 나머지 6명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신분을 숨기려고

본명 대신 가명을 썼습니다.

 

미스터 블론드, 미스터 브라운, 미스터 화이트,

미스터 오렌지, 미스터 핑크, 미스터 블루-

라고 부르기로 했죠.

 

이 강도단이 보석을 훔치러 갔더니,

어찌된 영문인지 벌써 경찰이 눈치까고 와서

기다리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치느라

뿔뿔이 흩어졌다가 약속 장소로 모이게 됩니다. 

 

딱 봐도 내부에 임포스터가 있는 각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짱구를 굴려가면서

통수친 놈을 찾으려 하다가

이런 저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약속 장소였던 창고 안에서의 씬과

(원래는 범행 성공 후 모이기로 했던 집결지였음)

회상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킬 빌」 같은 화려한 액션 대신

스릴러에 포커스를 맞춘 거죠. 

 

스릴러도 여기저기 막 조사하러 다니거나 하는

활동적인 스릴러가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입만 터는 아가리 스릴러입니다.

 

되게 지루할 것 같겠지만, 의외로 1도 안 지루합니다.

 

타란티노가 대사를 찰지게 잘 써가지고

(각본도 타란티노가 씀),

긴장감이 쫄깃쫄깃 살아있어요.

아가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여담) 타란티노가 자주 자기 영화에 출연하는데,

여기선 미스터 브라운 역으로 나왔습니다.

 

 

+ 젊은 시절의 마이클 매드슨, 

팀 로스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① 아가리 스릴러의 진수를 느끼고 싶은 분

② 퍼즐이 하나씩 모이다가 마지막에 챡 맞춰지면서 소오오름 돋는 스타일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 최근 몇 년간 하비 와인스타인개시발롬과 관련된 쿠엔틴 타란티노의 기사들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습니다. 타란티노가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권력을 이용한 성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며, 그걸 묵인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심지어 「킬 빌」을 찍을 당시 대릴 한나가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 그 사실을 타란티노에게 말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고 합니다. 범죄를 방관한 사람도 책임이 있습니다. 와인스타인만큼 쓰레기 새끼는 아니겠지만, 타란티노도 나쁜 생키인 거죠.

 

그러나 저는 그냥 타란티노 시발롬이라고 욕 한 번 하는 걸로 넘어가고 싶습니다. 타란티노를 쉴드치자는 게 아닙니다. 타란티노가 좃되든 말든 제가 알 바 아니에요. 단지 제가 재미있게 봤었던 영화의 추억까지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덕질했던 걸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이 더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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